기술과 예술의 융합인 미디어아트 현장에서 지난 20여 년간 디지털 기술이 인간과 사회를 바꾸어 가는 것을 목도한 필자는 21세기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술관의 맥락에서 기술을 바탕으로 창의성을 제고하는 새로운 교육에 관한 작은 실험들을 꾸준히 해 온 결과 앞으로의 교육에 관한 방향성을 짚게 되었다. 그것을 여기에 나누고자 한다.
기술과 예술의 융합인 미디어아트 현장에서 지난 20여 년간 디지털 기술이 인간과 사회를 바꾸어 가는 것을 목도한 필자는 21세기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술관의 맥락에서 기술을 바탕으로 창의성을 제고하는 새로운 교육에 관한 작은 실험들을 꾸준히 해 온 결과 앞으로의 교육에 관한 방향성을 짚게 되었다. 그것을 여기에 나누고자 한다.
흔들리는 미래
‘미래는 교육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라고 물었을 때 제대로 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교육이야말로 한 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계층갈등, 그리고 이제는 세대갈등마저 첨예하게 벌어지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날까지 밀려왔다. 20세기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교육정책과 현장을 장악하고, 21세기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20세기에는 그 시대의 도전이 있었다. 선진국들은 군비 경쟁과 산업의 고도화를 위해 달렸고, 우리나라와 같은 후발 주자는 먼저 근대화라는 과업에 직면했다.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산업화를 이루었고 곧이어 민주화까지 쟁취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도 유래 없이 빠른 속도로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선진화를 추동한 힘의 근원으로 국민의 높은 교육열을 빼 놓을 수 없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21세기에 접어 들면서 우리 사회는 혼돈의 변혁기를 맞고 있다. 마치 풍랑이 거세게 요동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선장도 나침반도 없이 마구 흔들리고 있는 배에 올라탄 느낌이다. 사방에서 아우성만 크게 들릴 뿐, 새로운 비전이나 질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들 눈 앞의 생존에만 급급할 뿐 미래를 생각하는 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교육은 미래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교육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미래에 관한 통찰과 청사진이 필요하다. 그것이 교육입안자로서 미래세대에 책임을 지는 자세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격변하는 세상에서 20년후의 세상을 예측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책임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먼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미래에 어떤 분야가 유망할 지 또 그것을 위해서 지금 어떤 학과를 학습해야 하는 지, 지금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이 점을 인정하는 것이 첫출발이다.
기술 문해력이 필요성
그 다음은, 거시적인 방향성을 가늠해 보는 것이다. 이는 비밀이 아니다. 조금만 주위를 기울인다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우선, 지난 세기 말 디지털 혁명 이후 우리 실생활에 깊숙이 스며든 기술 현실이 있다. 로봇, 인공지능, 블록체인, 메타버스에서 이제 챗GPT로 치닫고 있는 기술혁신에 대한 ‘문해력(literacy)’이 필요하다. 기술 발전을 무조건 따라잡으려고만 하면 평생을 쫓아도 끝이 없다. 어느 시점에서는 “왜, 무엇을 위해서” 특정 기술을 사용하는지에 관한 의견과 생각이 필요하다. 이것이 인간이 기술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한편 기술에 관한 문해력은 기술 자체에 관한 이해를 넘어 인간과 세상에 관한 어떠한 관점을 요구한다. 이것은 정신의 영역이며 결국 가치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의 기술 사회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만, 실은 매우 현실적인 이슈이다. 예컨대 현 디지털 기술의 총집합체인 자율주행자동차를 보자. 갑자기 뛰어 든 보행자를 피하기 위해 핸들을 어느 방향으로 꺾어서 누구의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지는 더 이상 기술적 문제가 아닌 것이다. 윤리적 이슈이며 사회 구성원이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이다.
철학에서는 위의 난제를 “트롤리 딜레마(Trolley Problem)”이라 부르면서 합리적인 결정이 불가한 예시로 든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여러 사람을 희생하는 것을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불법으로 도로에 뛰어 든 보행자는 죽여도 상관없다는 것은 인간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이다. 자율자동주행차 이전에는 이런 상황을 ‘사고’라 부르며, 시시비비를 가릴 때에도 운전자의 상태나 도로 상황 등 정상을 참작한다. 그러나 자율주행자동차의 경우 사고나 우연도 알고리즘화 된다.
정신적 능력의 함양
모든 것이 알고리즘에 의해 통제되는 세상이 결국 우리가 바라는 세상인가? 그런 세상에서 인간의 행복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영역은 정신의 영역이다. 목적과 가치에 관해 질문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미리 알아서 모든 것을 대령하는 기술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필요한 능력은 스스로 질문하는 능력이다. 교육은 이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정신적인 영역에 관련되는 것, 즉 인문학과 문화예술교육이 기술 교육과 함께 가야 하는 이유이다. 결국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관점을 갖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이다.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소크라테스로부터 교육의 목적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각 시대마다 인류가 처한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정체성 부분은 변화를 겪는다. 예컨대 20세기까지는 인간 대 기술, 이렇게 대면 구조로 놓고 보았는데, 21세기 인간은 기술과 한 덩어리가 되어 공진화 하는 존재로 파악한다. 또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도 달라졌다. 자연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 의해 다스려지는 존재에서 인간과 함께 가야 할 파트너의 위치로 격상되었다. 이는 기후 변화로 잇따른 자연재해를 맞이한 인류세시대에 두드러진 현상이다.
자연과 함께 하는 교육
21세기 교육의 세 번째 축은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이해이다. 자연과 환경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없이는 더 이상 인류 자체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다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관찰하고 또 자연 현상에 참여하며 가슴으로 배우고 익히며 즐기는 교육이다. 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산에 나무를 심고 잡풀을 제거하며 생태계를 더욱 온전하게 만드는 것을 온 몸으로 배우는 자연 교육을 모든 청소년들에게 필수 교과로 만들어야 한다.
자연 생태 교육은 비단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스마트 폰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오늘날, 스크린으로 눈을 뜨고 자기 전까지 스크린을 보다가 자는 청소년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필수적이다. 오늘날 청소년들 사이에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등 정신적인 질환이 급속히 번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되어 살아온 지난 20만년 대부분의 시간을 인류는 들과 산에서 햇빛과 바람과 맞으며 살아왔다. 흙, 나무, 비바람, 그리고 갖가지 동식물에서 나오는 파동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아온 인류가 실내로 들어온 것은 불과 100여년, 산업혁명 이후이다. 인간이 대부분의 활동을 실내에서 하게 된 것과 신경증(neurosis)의 발발이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20여년은 더욱 심화되었다. 실내에서도 작은 스크린 앞에 우리 몸이 고정된 것이다. 스크린이 내뿜은 특정 주파수 대역에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고, 우리의 뇌는 디지털의 시각적 자극에 과부하가 걸려있다. 여러가지 자양분을 골고루 섭취하며 자라야 할 청소년의 뇌가 지나치게 편중된 자극에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인내심을 요하는 깊이 있는 사고를 잘 하지 못하며, 트랜드에는 민감하지만 창의성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이 많고, 개인의 이익에는 기민하지만 공동체 의식이 약한 다음세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단지 디지털 세대의 특질이라고 치부할 일은 아니다.
건강한 개인과 공동체 만들기
결론적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의 핵심은 불확실한 시대를 스스로 해쳐 나갈 수 있는 건강한 심신을 가진 인간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불확실한 미래에 관해 미리 구체적인 준비를 해 줄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구체적인 진로를 찾아 가는 것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은 어떤 미래가 펼쳐져도 아이들이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는 튼튼한 몸과 마음을 길러 주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제대로 된 생각을 하는 모든 부모의 자식을 향한 바람과 다르지 않다. 이를 위해 나는 아래 세 가지를 교육의 역점으로 삼기를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함께 하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고 싶다. 기술발전은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를 심화할 것이다. 인류는, 화성 등으로 이주하지 않는다면, 그 어느 때보다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한 시기이다. 개인의 행복추구만이 절대 선이 아니고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는 가치를 교육을 통해 체화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의 교육은 위와 같은 방향으로 변해 갈 것이다. 생각하면 인류가 존속하려면 다른 방법은 별로 없어 보인다. 문제는 ‘얼마나 빨리’이다. 2023년 현재 인류는 문명사에서 일종의 변곡점에 처해 있는 것 같다. 정보폭발을 넘어 GPT4가 보여주듯 인지능력에 있어서 기계가 인간을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새로운 시대, 인지혁명에 걸맞은 교육혁명에 시동을 걸어야 한다. 미래는 이미 와 버렸다.
* 이 글의 내용은 아시아연구소나 서울대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Tag:미래교육,기술독해력,정신문화교육,자연생태교육,공동체의식
노소영(director@nabi.or.kr)
현) 아트센터 나비 관장, 서강대학교 초빙교수, KAIST 겸임교수
전) 2012 여수세계박람회 SK텔레콤관 총감독,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이사,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미디어 아트와 함께 한 나의 20년』(북코리아, 2022)
『디지털 아트(우리시대의 예술) 』(자음과 모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