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시온의 친구들 박물관 정면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걸개가 내걸렸다. 트럼프가 사용한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를 차용한 ‘이스라엘을 위대하게(Make Israel Great!)’ 문구가 쓰여있다.
출처: 연합뉴스 헬로아카이브
2024년 미 대선 캠페인 기간에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중동 이슈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면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전화 한 통으로 전쟁을 당장 끝낼 수도 있다고 했다. 공화당 공식 선거 플랫폼도 ‘중동 평화를 가져올 것,’ ‘이스라엘과 함께할 것’ 등 지극히 원론적 내용을 담았다. 그 대신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중에게 피로도가 높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이 아닌 인플레이션, 불법 이민 등 바이든 정부의 실패를 부각할 수 있는 국내 문제에 집중했다.
2025년 1월 출범할 트럼프 2기 정부의 중동 정책은 향후 역내 정세에 따라 구체적인 모습을 갖춰나갈 것이다. 트럼프 후보가 이번 캠페인에서 명확한 중동 공약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미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발표된 후보자의 중동 관련 공약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역내 정세의 특성상 취임 후 실제 정책으로 반영되지 못하고 재임 시절 급박한 지역 상황에 따라 변모하곤 했다.
그럼에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미 2017~2021년에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한 중동 정책을 편 경험이 있기에 이를 통해 2기 그림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트럼프 1기 정부의 정책으로 중동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중동 외교 안보 정책에서 역내 동맹 우방국과 국제사회가 아닌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국내 지지층 결집을 위해 미국 우선주의를 선동했다. 트럼프 2기 정부도 중동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국수적 민족주의를 노골적으로 강조할 것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이란의 핵개발과 역내 프록시(대리세력) 육성, 아랍 걸프 산유국과의 군사협력, 미국의 탈(脫)중동정책 등과 관련해 거래식 외교, 신고립주의, 보호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미국 외교의 전통적 가치인 동맹 강화와 인권·민주주의 도모를 파기할 것이다. 폭탄선언에 가까운 충동적인 결정, 지불 능력을 중시하는 동맹관에 따른 이분법적 사고, 후속 방안 없는 기존 관행의 파괴가 이어질 것이며 이러한 좌충우돌 외교 안보 기행으로 중동 내 여러 나라는 또다시 혼란스러울 것이고 역내 질서는 요동칠 것이다.
첫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둘러싸고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강경 우파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이스라엘 총리와 그의 안보 포퓰리즘 정책을 편파적으로 지지한다. 이번 대선 TV 토론에서도 “해리스가 당선되면 이스라엘이 사라질 것”이라면서 네타냐후 총리와 극우 정치인의 사임을 압박하는 민주당을 비판했다. 선거 캠페인 기간이던 7월 트럼프 후보는 네타냐후 총리와의 통화에서 “자신의 취임식이 될 2025년 1월 20일 전까지 전쟁을 끝내라”라고 주문한 만큼 신속한 종전을 추진할 것이다. 전후 가자지구 재건과 관련해서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고 아랍 걸프 산유국에게 재정 분담을 요구할 것이며 가자지구의 인도주의 구호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역량 강화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인 2018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고 미국 대사관을 옮겨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호를 위반했고, 2019년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이스라엘의 영토로 공식 인정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97호를 위반했다. 또한, 워싱턴 주재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대표부와 팔레스타인 주재 미 영사관을 폐쇄했고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 전체 기금의 30%에 달하던 지원금을 중단했다.
둘째, 이란의 핵개발과 역내 프록시 육성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최대 압박법을 선호한다. 이번 선거 캠페인 기간 트럼프 후보를 겨냥한 이란 혁명수비대의 암살 모의가 발각되고 이란 해커들이 트럼프 후보의 자료를 해킹해 민주당 선거 캠프 관계자에게 보낸 것으로 드러나면서 트럼프 당선인의 이란 압박 수위는 더 높아질 것이다. 현재 이란은 그 어느 때보다 핵무기 능력에 가까워졌다고 알려진 만큼 트럼프 2기 정부는 고강도 제재는 물론 군사 행동도 불사해 이를 저지하려 할 것이다. IAEA의 2024년 5월 보고서에 따르면 이란의 농축 농도 60%의 우라늄 비축량이 142㎏이고 이론적으로 핵무기 3개를 제조할 수 있다. 그래도 트럼프 후보는 선거 캠페인 기간 이란과 거래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다며 즉흥적인 협상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했다. 2018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주요 6개국과 이란이 어렵게 타결한 이란 핵 합의를 독단적으로 전격 파기한 후 고강도 제재를 시행했다. IAEA가 이란의 핵 합의 준수를 확인했으나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맺어진 ‘나쁜’ 합의였다며 구체적 대안도 없이 일방적으로 탈퇴를 선언했다. 2020년에는 이란 군부의 최고 실세이자 레바논·가자지구·시리아·이라크·예멘 등에서 친(親)이란 프록시 조직 육성에 매진해 온 가셈 솔레이마니(Qasem Soleimani)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드론 공격으로 암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깜짝 결정으로 알려진 이 작전 이후 이란 내 온건 개혁파 입지가 극도로 축소하고 강경 보수파가 득세하면서 이란의 군사 모험주의는 더욱 거세졌다.
셋째,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한 아랍 걸프 산유국과의 군사 안보 협력을 향한 트럼프 당선인의 입장은 매우 우호적이다. 이들 산유국은 미국과의 무기 거래 및 방산 협력에서 지불 능력에 근거한 거래주의 방식에 호응할 것이고 트럼프 당선인은 이들 국가에 인권과 민주주의 원칙을 압박하지 않을 것이다. 2017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가 사우디아라비아였을 만큼 이들 사이의 관계는 친밀하다. 2018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보국 요원들이 이스탄불 주재 자국 총영사관에서 반정부 언론인인 자말 카슈끄지(Jamal Khashoggi)를 잔인하게 살해하자 국제사회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을 거세게 비난했다. 하지만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비즈니스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며 의회의 사우디아라비아 무기 금수와 제재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트럼프 패밀리와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의 사적 친분에도 양국 사이가 늘 평탄하지는 않았다. 2019년 이란의 프록시인 예멘의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시설을 미사일과 드론으로 대거 공격했을 때 사우디아라비아의 바람에도 트럼프 정부는 우방국을 위해 별다른 대응 조처를 하지 않았다. 당시 후티 반군의 공격은 1991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정권이 쿠웨이트의 석유 시설을 공격한 이래 국제 원유 시장을 마비시킨 가장 큰 도발이었다.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 등 걸프 산유국은 트럼프 정부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기고 러시아와 중국을 향한 외교 다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마지막으로, 트럼프 당선인은 역내 안보 상황이나 동맹 우방국이 처한 군사 위협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미국의 탈(脫)중동 정책을 밀어붙일 것이다. 이라크 주둔 2,500여 명, 시리아 주둔 900여 명 미군의 철수가 신속히 이뤄질 것이고 철군 후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의 영향력이 빠르게 확대될 것이다. 2019년 트럼프 전 대통령은 돈이 많이 든다며 시리아 주둔 미군 병력을 대폭 철수하고 반(反)ISIS 국제연합전선에서 핵심 지상군으로 싸운 쿠르드계 시리아 민병대인 인민수비대 지원을 중단했다. 철군과 지원 중단이 이뤄진 지 사흘 만에 튀르키예군이 시리아 국경을 넘어 미국의 우방 인민수비대를 공격했으나 트럼프 정부는 방관했다. 오히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비용 지급을 약속했다며 사우디아라비아에 추가 파병과 첨단 무기 배치 계획을 발표했다. 또 2020년에는 우방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배제한 채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맺고 철군을 준비했으며, 이는 탈레반이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재집권하는 데 결정적 기회로 작용했다. 더불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시절 중동의 권위주의 리더와 기이한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21세기 술탄이라고 불리는 레젭 타입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튀르키예 대통령을 자신의 ‘터프가이’ 친구라며 치켜세웠고 G7 회의장에서 이집트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추락시킨 압델 파타 엘 시시(Abdul Fatah al-Sisi) 대통령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재자’로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사진 2> 2020년 9월 15일, 미 백악관에서 바레인-이스라엘 평화협정 서명이 이루어졌다.
출처: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관
그렇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도 중동 정책의 업적은 있다. 바로 기념비적인 아랍-이스라엘 데탕트(긴장완화)를 가져온 아브라함 협정 체결 과정에서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한 것이다. 2020년 수니파 아랍 국가 아랍에미리트와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이 관계 정상화에 깜짝 합의한 후 곧이어 바레인까지 참여해 백악관에서 역사적인 협정식을 하고 국교 수립을 선언했다. 아브라함 협정은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이자 백악관 선임 고문이던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가 설계, 추진했고 구시대적인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연대의 메커니즘으로 평가받는다. 안토니우 구테흐스(Antonio Guterres) 유엔사무총장도 중동의 평화와 안보를 증진하는 구상이라며 환영했고 바이든 민주당 후임 정부도 협정에 대한 강한 지지를 밝혔다. 트럼프 당선인은 아브라함 협정을 자랑스러운 치적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번에도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 국교 수립 성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설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의 2기 공화당 정부는 입법·행정·사법부까지 장악하고 당선인의 코드에 맞는 충성파로만 내각을 채울 것이라고 선언한 터라 더 강력해진 ‘트럼피즘’을 선보일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對)중동 정책은 다층적 딜레마에 빠져있다. 최고 우방국이자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의 방어권을 지지하면서 이스라엘·이란 무력 충돌이 가져올 수 있는 확전을 막아야 하고, 가자지구와 레바논 남부 지역에서 민간인을 보호하는 동시에 비(非)국가 이란 프록시 조직과 이슬람 급진주의 테러단체를 궤멸해야 하며, 중국 견제를 위한 탈(脫)중동 정책 추진과 함께 역내 신뢰 회복도 조속히 이뤄야 한다. 불행히도 이러한 다차 방정식의 해결에 대해 트럼프 당선인과 주변 엘리트가 깊은 관심을 보일 가능성은 꽤 작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