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 지리산, 옥산, 후지산, 태산(사진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 순으로) 출처: N트레블도쿄, 박정원
산악신앙의 보편성과 특수성
산악신앙은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존재하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진다. 기독교가 서구를 지배하기 전, 유럽의 각 국가 혹은 지역에 있는 고유의 신으로 인해 유일신 선교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 각 지역의 다양한 신은 모두 산과 직간접 관련된 형태로 좌정해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산악신앙의 보편성은 또한 그 지역만의 특수성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서양문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에서도 산악신앙의 보편성과 함께 특수성의 사례를 자세히 볼 수 있다.
수도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에는 전쟁과 지혜의 신인 ‘아테나 여신’이 좌정해 있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페르시아전쟁 승리 기념으로 지은 신전이다. 도시국가의 생존을 위해서 전쟁 승리는 필수적이었다. 그 신이 바로 파르테논(그리스어로 ‘처녀의 집’)에 있는 아테네의 여신, 아테나이다. 고린도 남쪽에 우뚝 솟은 아크로고린도스(Acrogorinthos‧575m)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가 좌정해 있다.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젊은 여사제들은 종교적 행위를 빙자하여 지역주민과 외국 상인들을 상대로 매춘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밤마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도시를 뒤덮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당시 고린도스는 상업적으로 매우 활발한 도시였다. 돈을 번 남자들은 아크로고린도스에 가기 위해 줄을 서서 대기했다고 한다. ‘고린도’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방탕함’ ‘사치스러움’ ‘성적인 문란함’의 어원이다. 정황상 사랑의 신이 좌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여겨진다.
고대 올림픽이 열린 도시 올림피아엔 최고의 신 ‘제우스’가 모셔져 있다. 물론 지금은 누가 가져갔는지 훼손됐는지 없다. 당시 올림픽은 도시국가들 간 치열한 전쟁을 치르다 잠시 휴전 기간 중 전의를 가라앉히고 친목을 다지기 위해 펼쳐졌다. 당연히 최고의 신 제우스가 모든 도시국가가 모인 자리에 중재를 나섰을 것이다. 또한 출전 선수는 휴전 기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무기를 내려놓고 발가벗은 채 경기를 펼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테네 옆 해안 도시 수니온곶이 있다. 예로부터 군사‧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상요충지다. 이곳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모신 포세이돈 신전이 있다. 인류 최초의 의사로 알려진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인 코스섬 아스클레피온 신전에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모셔져 있다. 그리스는 이 외의 지역에서도 다양한 신들이 그 역할과 장소에 맞게 좌정해 있는 사실을 현지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서양문명의 발상지 그리스에서 신의 보편성과 그 지역과 상황에 맞는 특수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유일신 아래서는 신의 보편성과 특수성은 발생할 수가 없다. 유일신은 하나의 신으로 세상의 통일을 꾀하기 때문에 보편성과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고대 서양에서는 유일신보다는 각 지역의 상황에 맞는 신과 보편적인 산악신앙이 팽배해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보편성과 특수성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동아시아, 즉 한‧중‧일과 대만에서도 다양한 신으로 나타나는 산악신앙이 존재했다. 산악신앙은 전통 토속신앙의 형태로 존속하다가 종교로 발전하지 못하고 특정 종교와 습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시기가 대략 중국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B.C 200년 전후로 알려져 있고, 한국은 삼국시대 초기, 일본은 국가의 틀이 잡히기 시작하는 6~7세기 전후로 추정한다. 대략적으로 전통 토속신앙과 불교 또는 도교와의 습합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여기서 생성된 핵심적인 개념이 중국은 옥황과 삼청 및 신선(神仙), 삼교합일의 형태로 나타난다. 한국은 고대 산신에 이어 조선시대엔 신선 및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표출된다. 일본은 신도(神道)에 이어 슈겐도 혹은 야마부시(山伏: 영험한 깊은 산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초월적인 능력을 얻은 후 마을로 내려와 활동하는 사람) 등으로 대표할 수 있다. 한‧중은 만물에 머무는 정령(精靈)을 산악신앙의 대상으로서 숭배시한 반면 일본은 이에 더해서 지진이나 화산과 같은 특정한 자연물과 현상들을 숭배했다는 점에서 조금 더 광범위하면서 차이를 보인다. 대만은 전형적인 산악지형이기 때문에 부족신앙의 형태를 띤다. 한‧중‧일과 조금 차이를 보인다.
한‧중‧일‧대만의 산악신앙은 이와 같이 애니미즘적 보편성은 뚜렷하지만 각각의 특수성은 지역 상황에 맞게 다르게 나타난다. 보편성은 다신으로, 특수성은 개별적인 산악신앙의 형태로 특징지을 수 있다. 각 국가에서도 각각의 산에 다른 신들이 좌정해 있기 때문에 각 국가의 대표적인 산을 하나씩 꼽아 산악신앙에 대해 살펴보자.
한국 지리산의 산악신앙
지리산은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명산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한반도 오악 중 남악으로 지정한 이래 <삼국사기>부터 명산으로 언급되지 않은 역사서가 없을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일부 풍수전문가들은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의 안(앞)산이 백두산이고, 백두산의 안산이 지리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악에 대한 제사는 기본적으로 나라의 평안과 발전을 비는 행사였다.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호국신앙의 반영으로 국가 주도의 산신제를 지냈다. 산신제는 지방 호족세력을 진압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응집시킬 수 있는 산신제의 강력한 대상이 필요했다. 남악 지리산에 등장하는 산신은 성모천왕, 마고할미, 선도산신모 등으로 여성성을 띤다. 초기 원시사회의 모계사회 영향으로 여성성을 띤 것으로 추정한다. 성모천왕과 선도산신모는 중국계 산신의 변형으로 알려져 있다.
마고할미는 토착 지리산 산신의 전형으로 파악된다. 원래 마고할미는 해남‧강진 등 주로 해안 도서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는 지역 전설의 하나로 전하는 거인신화의 대표적 사례다. 강진의 달마산에 가면 마고할미 산신에 관한 안내문이 있다. 제주도의 설문대 할망, 서해안의 개양할미, 강원도의 서구할미, 경상도 동부해안의 안가닥할미 등이 창조신화에 해당하는 여성거인신화이다. 중국 오악도 여성거인신화가 나타난다. 지리산 마고할미는 천왕봉 성모천왕의 변형된 형태이다. 성모천왕은 마고할미, 노고(老姑)로도 불리며, 이후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로 변신한다. 이 같은 내용은 <삼국유사>나 근대 들어서 이능화의 <조선무속고>, 권태효의 <한국의 거인설화>에 그대로 소개된다.
성모천왕신앙은 통일신라기에 남악 지리산에 영향을 미쳤고,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왕건은 성모천왕을 그의 어머니 위숙왕후와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과 동격으로 삼아 지리산 산신으로 좌정시킨다. 왕권을 절대 권력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산신을 이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산악신앙을 지배이데올로기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마고’를 한민족의 조상이자 최초의 국가로 주장한다. 한민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가 ‘마고지나(麻姑之那)’라고 한다. 마고지나는 ‘마고의 나라’라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1만 2,000여 년 전에 건국했다고 한다. 진위 여부를 떠나 마고할미는 지리산 산신의 원형으로 봐도 무리 없을 것 같다. 마고할미라는 명칭의 흔적은 노고단(老姑壇)에서 찾을 수 있다.
지리산 산신의 근원은 천신이었지만 여성신인 마고할미, 성모천왕과 혼인을 한 남성신 반야 혹은 법우화상 등을 거치면서 신라 이후부터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와 마야부인 등으로 다양해진다.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산신에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는 유교가 국교로 지정됐지만 전통적 가치인 산악신앙은 여전히 서민들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다. 왕조에서는 남악제례를 유교식으로 바꿨다.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방식으로 산신제 위패도 정했다. 지리산의 경우 지리산지신(智異山之神) 또는 지리산대대천왕(智異山大大天王)이라고 썼다.
지리산은 지금도 구례에서 ‘남악제례’를 유교식으로 지내고 있다. 다른 지역은 사찰 내에서 불교식 또는 무속식 산신제를 지내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다. 2005년 남악제에 전국의 유림 대표가 참여하기도 했다.
따라서 산신제는 유교와 불교, 도교 혹은 무속까지 전부 아우른 전통신앙으로 볼 수 있다. 국가주도형 혹은 관 주도형 산신제, 즉 공식적 산악신앙은 일제 강점기에 완전히 사라졌다. 전통이 아니라 미신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일부 명맥을 유지하던 한반도 전통 신앙의 본거지였던 신도안(新都內)도 5공 때 국군통합본부 조성이라는 명분으로 완전 공중분해 됐다. 신도안은 조선 개국 때 도읍 후보지로 꼽혔던 바로 그 명당터이다.
일본 후지산(富士山) 산악신앙
일본 신화 또는 산악신앙을 알기 위해·서는 고대 일본어 ‘마레비토(まれびと‧Marebito‧稀人)’란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마레’는 희귀한이란 뜻이고, ‘비토’는 사람이나 정신을 의미한다. 먼 산 너머나 지평선 너머 선물을 가지고 일본의 마을을 방문하는 것으로 믿는 많은 신들을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보통 의식이나 축제와 함께 마레비토를 환영한다. 그게 아직까지 마을마다 전승되고 있는 마쯔리(まつり)이다.
일본은 고대로부터 천강(天降)과 도래(渡來) 두 신화가 전래해 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은 높은 산에 하강하고, 바다를 건너오는 신은 강을 따라 올라와 인간세계에 내방한다. 산과 강은 신의 교통로이자 신을 맞이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 신이 깃드는 곳이 산중의 암석이나 수목이고, 바다를 통한 경우는 배이다. 신이 내리는 대상물, 즉 빙의되는 곳을 ‘요리시로(よりしろ)’라고 한다. 이 요리시로가 제사의 장소가 된다. 사람들은 1년에 한 번 내방한 신을 맞이하면서, 신에게 풍요와 복을 빈다. 이것이 축제, 즉 마쯔리의 기원이다. 따라서 일본에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인들이 영산(靈山)으로 숭배하는 후지산(富士山) 산악신앙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자.
후지산은 에도(江戶: 1603~1867)시대 들어 일본 최고의 산으로 명성을 얻은 후 지금에 이른다. 그 이전에는 단연 하쿠산이었다. 이들 두 산과 다테야마를 꼽아 일본의 3대 영산으로 평가한다. 일본 신화에서도 후지산의 여신과 천신의 자손이 천왕가를 형성했다고 전한다. 또한 예로부터 부처님과 신은 산에 거주한다고 믿어왔다.
일본인들의 산악신앙 중에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현세와 내세의 경계로 산 입구나 산에 있는 특징적인 숲이나 바위로 구분한다는 점이다. 산 중간에 아오이시(靑石)란 바위는 유명하다. 일본인들은 이 경계선에 불상이나 쌀‧소금을 올리고 촛불을 밝히며 기도를 올리곤 한다. 일본 종교학자 쿠보타 노부히로(久保田 展弘)는 “아오이시는 천상계와 지하계를 연결하는 우주의 축과 같은 역할을 하며, 여기서부터 정상까지 천상계로부터 신이 강림(降臨)하는 것을 암시한다”라고 그의 책 <山岳靈場巡禮(산악영장순례)>에서 설명하고 있다. 일본인들에겐 아오이시를 넘어서는, 혹은 아오모리에 들어서는 순간 천상계, 아니 ‘신들의 세계’에 접어드는 것이다.
후지산 입구나 산기슭에 있는 센겐진쟈(浅間神社)는 후지산의 신을 숭배하는 후지산악신앙의 중심이다. 후지산혼구센겐다이샤진쟈는 전국적으로 1,300여 개소에 이르며 센겐진쟈의 총본산이다. 이는 후지산 산악숭배신앙의 대표적 명소이다. 센겐진쟈는 865년에 최초로 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센겐진쟈에서 신도문(神道門)을 세워 산 정상 신이 있는 데까지 금욕적 수행 행렬을 정기적으로 열었다는 기록은 12C부터 소개된다. 금욕적 수행을 하는 사람을 슈겐도(修驗道)라고 한다.
일본 산악신앙은 신도신앙을 근본으로 한다. 일본 신도는 천왕의 조상신이라고 믿는다. 신도신앙은 산, 폭포, 바위, 나무 등의 자연물을 신으로 숭배한다. 신과 인간을 잇는 도구와 방법이 제사이며, 그 제사를 지내는 곳이 신사이다. 고대인들은 산신이 평야지대에서 벼농사에 필수적인 물과 도시생활에 필요한 돈을 다스린다고 믿었다. 또한 나라(奈良)를 세운 초대 천왕을 지도하는 신이 산에 거주한다고 생각했다. 신에 접근하기 위해서 쉬운 주문을 외우고, 또한 그 쉬운 주문만으로도 깨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진언종은 일본 전통신앙인 신도와 쉽게 습합한다. 이게 바로 지금까지 전하는 신불습합신앙(神佛習合信仰)이다. 산악신앙인 신도와 불교의 습합이다. 신도와 슈겐도가 일본 산악신앙의 핵심 개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일본 사찰에는 사(寺) 또는 원(院)이 붙는 반면, 신사에서는 신사(神社) 또는 궁(宮)을 사용한다.
산악신앙에 등장하는 초기의 신은 여성성이다. 헤이안(平安: 794~1185년)시대 <후지산기(富士山記)>에는 후지산 정상에서 두 명의 선녀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봤다는 기록이 소개된다. 여신의 이름은 아사마노오오카미(あさまのおおかみ‧浅間大神). 아사마라는 뜻은 분화하는 산의 위대한 신이라는 뜻이다. 이어 가마쿠라(鎌倉: 1185~1333년)시대에 출판된 <후지연기(富士緣起)>에는 후지산 여신이 푸른 기모노를 입고 보물 구슬을 들고 흰 구름을 타고 구름 위에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다. 이 시기에는 센겐다이보사츠(浅間大菩薩)라는 여신으로 불렸다. 700~800년 전에는 다케토리 모노가타리(竹取物語)의 카구야 히메(かぐや姫)가 후지산의 여신이라고 한 시기도 있었다.
현재 센겐진쟈가 받들고 있는 신은 고노하나 사큐야히메(木花開耶姬)라 불리는 여신(女神)이다. 꽃이 핀 것처럼 아름다운 신이란 뜻이다. 약 300년 전 에도(江戶)시대에 현재 여신의 이름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후지산 여신 고노하나 사큐야히메의 사자(使者)는 원숭이다. 원숭이는 일본의 대표적 동물 중의 하나. 이와 관련한 전설도 많이 전한다. B.C 360년경 원숭이해에 후지산이 생겨났다는 전설도 있다. 그래서 원숭이는 후지산의 상징적 동물로, 원숭이해에 후지산을 등산하면 많은 복을 받는다고 전해진다.
중국 태산(泰山) 산악신앙
태산(泰山)은 자타공인 중국 최고의 명산이다. 태산을 두고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양에 올림푸스산이 있다면, 동양엔 태산이 있다”고 말한다. 올림푸스산은 두말할 필요 없이 서양 신화와 역사의 원천이다. 태산도 이에 못지않다. 중국 고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곽말약(郭末若)은 “태산은 중국 문화사의 축소판이며 결정판”이라고 했다. 태산이 중국 정신사적으로나 종교적, 문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태산은 1987년 세계복합(자연+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자연경관만으로 보자면 사실 뛰어나지는 않다. 그 의미와 가치로 평가받은 면이 크다. 유네스코는 등재이유를 ‘태산은 특별한 역사적, 문화적, 미적, 과학적 가치를 지닌 중국의 가장 유명한 성산(聖山)이다. (중략)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문화의 요람이었다. B.C 219년 이전부터 산악숭배의 중요한 제의 대상이었고, 중국통일의 성공을 신에게 알리고자 진(晉)의 천자인 황제 자신이 봉선(封禪)을 거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봉선은 황제가 하늘과 산천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역대 황제들은 태산을 가장 많이 방문했다.
태산은 중국의 오악 중에 가장 중요한 동악이다. 오악은 중국을 최초 통일한 진나라 당시 지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악이라는 지리적 공간, 즉 국경의 개념과 오악의 신을 통해 국가를 방위하려는 절대권위적 개념, 나아가 종교‧문화적 개념까지 포괄하고 있다. 오악에 좌정한 신을 통해 중국인들은 산악신앙을 가졌고, 산악숭배를 실천했다. 서민들의 믿음의 대상이 된 수많은 신들이 오악에 좌정해 있다. 신이 있으면 당연히 신화도 만들어진다. 오악과 관련한 가장 대표적인 신화는 육조시대 임방이 쓴 <술이기(述異記)>에 나온다. 중국의 천지개벽 당시에 ‘반고(盤古)가 죽은 후에 머리는 동악, 배는 중악, 왼팔은 남악, 오른팔은 북악, 발은 서악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원시시대의 여성성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동악 태산이 가장 중요시되는 이유는 인체 중에 가장 중요한 반고의 머리 부분이 태산이고, 해가 뜨는 동쪽이기 때문이다. 동쪽은 또한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상징하고 만물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상징성도 다른 방향보다 훨씬 크다.
태산에 좌정한 신들도 중국 최고의 신들로 꼽힌다. ‘동악대제’는 송대 이후 도교신으로 정착한 태산부군의 호칭이다. 한 대에 민간에서 태산부군으로 부르다, 당대에 천제왕으로 바뀌었다. 태산부군은 천제의 손자로 사람의 혼백(魂魄: 마음과 육체)을 불러들이는 생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숭배됐다. 동악대제의 딸은 벽하원군으로, 낭랑신의 첫 번째로 꼽힌다. 서양에서는 벽하원군만을 대상으로, 즉 벽하원군이 누구인지, 무엇을 상징하는지 등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벌일 정도다. 낭랑은 전형적인 도교의 신이다. 송자낭랑은 자녀의 잉태, 자손낭랑은 자손번영, 두진낭랑은 천연두 치유, 최생낭랑은 출산 촉진, 안광낭랑은 눈병치료 등으로 아직까지 중국민들의 민간신앙에 깊숙이 전승되고 있다.
도교 최고의 신은 노자에서 원시천존을 거쳐 옥황상제로 귀결되는 과정을 거친다. 옥황상제는 태산 정상에 모셔져 있다. 옥황이란 명칭은 최고 신인 원시천존의 아칭인 옥제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도교의 삼청신앙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옥청‧상청‧태청의 삼청은 각각 원시천존‧영보천존(태상도군)‧도덕천존(태상노군)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교에서 최고의 신은 바로 이 삼청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가운데 원시천존이 가장 우위에 있다. 삼청의 우두머리인 원시천존은 우주만물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태산에 가면 자주 눈에 띄는 청제(靑帝)는 동악의 신 태호(복호 또는 복희라고도 한다)를 가리킨다. 상고시대 전설 속의 동이족 수령이다. 다섯 방위를 관장하는 수호신인 오방신장의 하나로써, 봄을 맡는 동쪽의 신이기도 하다. 태산에 가면 주변에 있는 절의 주련이나 깃발이 모두 청색으로 되어 있다. 이는 청색이 동쪽의 상징색이기 때문이다. 봄의 신 태호는 동방의 천제이고, 신하 구망은 태호 밑의 속신이 됐다고 중국신화에 전한다.
중국 산악신앙 중에 가장 큰 특징은 유불선 삼교의 통합이 그대로 표출된다는 점이다. 유교에서는 태산을 성산(聖山), 도교에서는 선산(仙山), 불교에서는 영산(靈山)으로 부른다. 각 종교의 장점을 국가통치이념과 개인의 수행에 그대로 이용했다. 유교와 불교는 주로 통치이념으로, 도교는 산악신앙과 민간신앙으로 주로 전승되어 송 효종대에 이르러 이불치심(以佛治心), 이도치신(以道治身), 이유치세(以儒治世)라는 구호로서 완성을 보게 된다. 삼교합일을 이룬 것이다.
대만 옥산(玉山) 산악신앙
대만 옥산(3,952m‧Jade Mountain)은 동북아 최고봉이다. 실제 발음은 유샨이지만 그냥 우리 식으로 표기한다. 한때 옥산이 3,997m로 알려져 대만 정부에서 상징적으로 4,000m를 넘기기 위해 정상에 3m 높이의 탑을 쌓은 적 있다. 하지만 실제 고도가 3,952m로 밝혀지자 4,000m의 표지석과 탑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대만은 전체 면적이 한국의 영남지방에 제주도를 합친 크기와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좁은 땅에 3,000m급 봉우리만 100개 이상 된다고 한다. 222개라는 설도 있다. 그러니 섬 전체 면적 80% 이상이 산지다. 대만 민족 대부분 산을 개간해서 거주한다.
자연환경 조건이 이렇다 보니 대만은 전형적인 고산족이다. 옥산에 거주하는 대표적인 고산족이 부눈(Bunun‧布農)족. 부눈족은 원주민 집단 중 가장 높은 곳에 살며, 오랜 세월 산악 생활에 적응해 왔다. 이들은 산 중턱 경사면에 분포해 있으며, 같은 씨족으로 넓게 거주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오래전 어느 날 하늘에서 조롱박 하나가 떨어졌는데, 그 박이 깨진 자리에 남자와 여자가 나왔다고 전한다. 그 남녀 한 쌍의 후손이 지금 부눈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부눈족의 조상은 서부 평원에 살다가 옥산으로 이주하여 최초의 산악 부족인 타이샤를 세웠다고 한다. 부눈족은 부계사회로 가부장적이며, 남성들은 높은 가문과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 이들 부족은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가진 노인이 다스리며, 지도자는 부족 장로회의에 의해 결정된다. 부눈족에게는 3명의 주요 인물이 있다. 하나는 농업 의식을 관장하는 무당으로, 하늘과 기후를 관찰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분쟁을 조정하는 데 능숙한 인물이다. 두 번째는 가장 많이 사냥한 인물로 축제의 주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 번째는 정치 지도자로서, 외부와의 전쟁에서 사령관으로 앞장서며 복수를 책임지기도 한다.
부눈족의 신화에 의하면, 달을 제물로 바치거나 태양이 달로 변하는 내용이 전한다. 태고에는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이 번갈아 지구를 비추고 강한 빛이 매우 뜨거워서 낮과 밤의 차이가 없었으며, 동물의 가죽을 쓴 아기도 햇볕에 타서 도마뱀이 되어 죽을 정도였다. 부눈족의 부자가 원정을 떠나면서 왼쪽 눈에 보이는 태양을 쏘아 떨어뜨리면서 그 태양은 은은한 달로 변했고, 그때부터 지구는 태양과 달, 낮과 밤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부족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한쪽 눈에 피를 흘리는 성난 달이 그들을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고, 부눈족은 달에게 ‘타바하’라는 천조각을 주어 피를 흘리는 눈을 닦게 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보름달이 되어도 천의 희미한 부분은 보이게 됐다고 전한다. 이에 부눈족은 달의 문화에 따라 다양한 풍습과 의식을 치르게 됐다.
부눈족은 모든 사물에 영혼, 즉 신이 있다고 믿으며, 사람의 영혼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몸에서 물려받은 것이며, 동시에 아버지가 준 영혼은 선과 악, 두 가지라고 믿는다. 이같이 옥산의 산악신앙은 부눈족과 이들의 신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지금 옥산에 가면 이러한 신화와 전설이 고스란히 전한다. 한‧중‧일의 산악신앙과는 조금 다른 형태를 띤다. 어떤 측면에서는 신화학이나 역사학, 민속학보다는 인류학적 연구가 필요한 산악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산악신앙의 영향은 대만인들의 종교의식 조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미국의 세계적인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의 2024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만인들은 불교가 28%로 가장 많고, 도교 24%, 기타 민간신앙 12%에 이어 기독교 7%로 나타났다. 무종교는 27%로 다른 동아시아에 비해 가장 낮았다. 대만은 불교와 도교가 주류를 이루지만 민간신앙과 습합을 이룬 내용이 많아 실제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민간신앙이 부눈족의 신화가 자리 잡은 옥산의 산악신앙인 것이다.
<그림 2> 대만인의 종교의식 조사 출처: 퓨리서치센터
결론
산악신앙은 실로 모든 민족들의 근저에 남아 있는 신앙이다. 선사 이래 모든 민족이 제천행사를 지냈고, 그 장소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서구는 유일신으로 산악신앙 또는 다신이 사라진 듯하지만 고대 유적지를 보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다신의 영향은 자연환경과 더불어 그 지역에 사는 민족성에까지 영향을 미쳤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세계 50여 개국을 여행하면서 그 지역 거주자들이 전통 산악신앙을 잘 간직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아, 이 민족에게 산악신앙의 영향이 그대로 미쳤구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산악신앙과 민족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부분은 앞으로 연구대상이다.
그런데 ‘산악신앙은 왜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을까’ 하는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종교는 개인적 믿음을 바탕으로 가족, 나아가 공동체 커뮤니티를 형성해서 집단지성을 구성한 뒤 대중화할 수 있는 이론적, 논리적 근거를 갖춰 집단 믿음을 확산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산악신앙은 마을 단위 커뮤니티까지 형성했으나 이론적, 논리적 기반을 마련할 집단지성을 구성하지 못했다는 점이 종교로 발전하지 못한 결정적 한계로 작용하지 않았나 판단한다. 제정일치사회에서는 강력한 파워를 발휘했으나 신정분리 이후엔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왕권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더 이상 종교로 발전하지 못하는 한계도 드러낸다. 이로 인해 결국 민간신앙 또는 토속신앙의 형태로 명맥만 유지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본다. 또한 불교나 도교, 유교 등에 습합되면서 종교로 발전할 기회를 잃어버린 측면도 있다. 결국 하위문화가 상위문화에 흡수된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