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언론자유
<국경없는기자회(RSF)>가 2023년 발표한 세계 언론자유 지수에 따르면, 조사대상 180개국 가운데 상황이 좋다는 8개국 중에 아시아 국가는 없다. ‘만족할만하다’는 등급을 받은 44개국 중에 동티모르(10위), 대만(35위), 한국(47위)이 포함되어 있다. 이하 일본과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은 ‘문제적’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지수 최하위 3위에 나란히 오른 북한, 중국, 베트남과 함께 만년 낮은 언론자유 지수를 기록하는 미얀마, 방글라데시,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을 고려하면 아시아에서 언론자유는 대체로 낮은 수준이면서 불균등하게 분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시아에 자유가 없다는 말은 오랜 연원을 갖고 있으며, 그에 대한 해석과 논평의 갈래들도 갖가지다. 그러나 언론탄압 횟수를 계수하고 언론인을 조사하는 것만으로 자유를 측정할 수 없다거나, 서구의 시민적 자유주의 잣대를 아시아 국가에 일률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거나, 또는 아예 아시아에서는 자유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이 특별한 종류의 부자유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아시아에서 공개적으로 권력을 비판할 자유, 인기 없는 생각을 표현할 자유, 전통과 관습에 거스른다는 두려움 없이 말할 자유가 대체로 부족하며 불균등하게 분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부자유의 분포가 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갖는 함의는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1975년 일본의 언론인 모리 교조(森恭三)는 『계간 일본(Japan Quarterly)』 제22권 2호에 게재한 ‘언론자유와 아시아(Freedom of the press and Asia)’란 글에서 “아시아에서 진정한 의미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곳은 일본과 홍콩뿐이다”고 평가했다. 자유로운 나라의 목록이 바뀌었을 뿐 반세기 전 아시아 언론자유의 분포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모리의 의도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일본과 홍콩처럼 자유롭게 되면 좋겠다는 식의 발전론적 제언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모리는 먼저 한국, 대만, 남베트남, 필리핀 등에서 자유를 위한 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각국의 친미반공주의 세력이 언론을 탄압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현실을 염려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와 기업이 아시아 선린외교와 이익추구를 명목으로 민권운동을 억압하는 아시아 권위주의 정부들을 도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 언론은 정부가 아시아와의 전후 관계개선을 도모하면서 현지 억압적 정부를 돕거나 기업이 아시아 진출을 이유로 현지 수탈에 기여하는 것은 아닌지 적극 감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덧붙여 모리는 이렇게 논평했다. “언론자유를 위한 운동은 각국의 문제에 따라 자기 국가 내에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필자는 일단 모리가 1975년 일본 정부와 기업에 대해 제기한 문제의식과 일본 언론에게 권고한 바를 2023년 우리 정부, 기업, 그리고 언론에게도 필요한 변용을 가해서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일국적 범위에서 각자 분투하는 편이 좋겠다는 그의 권고가 과연 21세기에도 적절한지 검토할 필요하다. 아시아 국가들의 언론자유 수준과 양상은 서로 다르더라도 민주화, 도시화, 문명화를 돕거나 저해하는 언론의 역할은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각자 분투하는 민권운동과 언론자유 투쟁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도대체 어디까지가 각국에 제한된 특수한 과제에 대한 대응인지, 어디서부터가 공통의 경험인지 검토하면 좋겠다. 역사적으로 다른 경로를 따르지만 구조적으로 유사한 부자유의 조건들은 없는지, 그리고 각자 다른 맥락에서 경험한 자유의 진전이지만 서로 경험을 공유하고 배울 바는 없는지 물어야 한다.
민주화에 대한 언론의 기여
아시아 언론자유에 대한 접근을 위해 ‘민주정으로 가는 과정’, 즉 민주화와의 관련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적절하다. 개별 국가에서 민주정으로 이행하는 경로는 물론 민주정의 유지 또는 와해의 방식에 따라 언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검토함으로써 언론자유에 대한 일국적 경험담을 넘어선 설명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연구자들은 언론자유와 민주주의 간의 상관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며, 그 관계에 대한 설명도 자명하다는 듯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독재는 물론 권위주의적 민주정이 민권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언론통제라는 해묵은 수법을 동원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식의 설명이 그것이다.
그러나 좀 더 면밀하게 관찰해 보면, 언론자유와 민주주의 간에 상관관계를 발견하더라도 그 관계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인과성을 함축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억압받지 않는 언론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를 돕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방해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이라고 해서 언론자유를 보장하는 것만도 아니다. 실로 언론은 얼마든지 억압적 정권에 자발적으로 복무하기도 하며, 심지어 억압적 정체를 만들어내는 결정적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최근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인민주의적 권위주의 정권이 도래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증오를 동원하는 자유언론’의 활약을 들 수 있다. 인종이나 종교, 그리고 정파로 내분을 겪는 아시아 국가에서 인터넷 언론매체를 포함한 자유로운 언론이 최악의 증오를 촉발하는 경우를 관찰할 수 있다.
언론자유와 민주주의 간 상관성을 검토하는 데 개입하는 또 다른 어려움으로 개념적 중첩의 문제가 있다. 만약 민주주의를 자유롭고 평등한 선거에 의해 선출된 권력과 법치주의, 그리고 인권은 물론 포괄적 시민권이 보장된 정체라고 폭넓게 정의하면,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의 관계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되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 상관관계를 발견한다고 해도 대수롭게 여길 만한 게 별로 없다. 반면 민주주의를 “평등한 선거권에 기초한 자유선거 하에 이루어진 권력교체”라고 최소주의 관점에 따라 정의하면, 이런 제도의 확립이 ‘억압받지 않는 언론’과 갖는 경험적 연관성을 발견했다고 해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만다.
언론자유와 민주주의 간 상관관계를 예단하기 어려운 사정은 언론 쪽에도 있다. 언론자유란 흔히 언론에 대한 권력기구의 통제가 법적으로 통제되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통제의 종류와 범위에 따라 언론자유의 실질적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스스로 통제하는 언론’의 문제가 있다. 스스로 채택한 전문직 규범에 따라 자신을 규율하는 언론은 일단 자유롭다고 간주되지만, 그런 자기 규율이 외적인 통제의 논리를 내면화한 자기통제인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권위주의적 세력을 도와 억압을 행하는 언론은 흔히 권력기구의 노골적인 통제를 받는다기보다 스스로 선택한 신념과 의리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보를 선별하고, 자유롭게 가공하고, 진정성을 발휘해서 윤색하여 전달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시아에서 언론자유의 조건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하는 이유로 바로 이런 ‘내면화된 자기통제’가 고착된 현실을 들고 싶다. 오래된 민주정을 누리는 일본에서부터 민주화의 도정에서 비틀거리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언론의 자기규율이 민주주의를 위한 더 많은 기여를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배경으로 삼아 언론의 역할을 살피는 게 중요한 이유는 언론이란 단지 그것이 유통하는 내용, 즉 정보나 표현을 통해서만 효과를 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발언하는 행위도 그렇지만, 발언할 기회를 노리거나 내용을 준비하는 행위, 그리고 발언의 파장에 따른 해석적 행위 등이 모두 민주적 여론형성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기여한다. 따라서 언론활동이 창출하는 여론형성의 장 내에서 발언이 교환되는 양상, 즉 공론장 내에서 소통의 양상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내면화된 자기통제로 인해 결코 자유롭다고 할 수 없는 부패한 언론이 민주화 도정에서 야권의 세력 결집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도 있고, 민주화 이후 자유를 누리는 언론은 인민주의적 권위주의 세력이 재집권을 노리는 일을 도울 수도 있다.
갈등의 매개체로서의 아시아 언론
볼트머(Voltmer, 2013)에 따르면, 민주화 과정에서 언론의 순기능은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첫째, 지배세력 내부에서 언론은 자유주의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지배세력이 극단적이거나 강경한 탄압으로 나가는 것을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둘째, 언론은 지배세력의 부패나 실패를 폭로하면서 분열된 야권 세력을 결집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아래로부터 대항세력을 형성하는 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볼트머의 관찰에 근거해서 우리는 지배와 대항세력 간의 대립은 물론, 지배세력 내부의 균열, 그리고 대항세력들 간의 갈등을 표현하고, 조절하고, 매개하는 방식으로 언론이 민주화 또는 반동에 기여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사회 내 갈등을 매개하는 언론의 역할은 특히 민주화 이행에서 결정적 시기, 즉 권위주의 정권 내부에서 벌어지는 권력 할양의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데 유용하다. 일찍이 달이 <다두정(Poliarchy, 1971)>에서 제시하고,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이 <독재와 민주정의 경제적 기원(Economic origins of dictatorship and democracy, 2006)>에서 발전시킨 민주화 이행을 설명하는 가설에 따르면, 사회 내부의 갈등이 첨예화하면서 지배세력이 대항세력들의 정치적 요구를 억압하는 비용이 증가해서 더 이상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할 때, 지배세력은 시민들의 참정권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정치권력을 나누는 대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커진다. 볼트머의 관찰을 결정적 이행 국면에 적용해 보면, 권위주의 권력에 복무하는 부자유한 언론은 사회의 갈등관리 비용에 대한 의제를 형성하고 지배세력 내의 이해를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고, 정치권력의 할양 과정에서 확대된 담론의 공간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민주화 이행을 도울 수 있다. 이 설명은 어쩐지 1980년대 말 한국에서 이루어진 민주화 이행에서 언론이 수행한 역할을 묘사하는 듯하다.
아시아의 많은 국가에서 민주화 이행 이후에 민주정의 공고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해 볼 수 있다. 신생 민주정에서 갈등하는 정치세력들이 자유선거를 통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한 조건에서, 정치적 갈등의 양상이 걷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증폭할 수 있다. 집권세력은 물론 야권이 (이들은 급진적인 개혁세력일 수도 있지만 얼마 전 민주화 이행을 통해 권력을 양도한 전 여권일 수도 있다) 권력의 향방에 따른 이해관계의 차이를 크게 인식할수록 상대의 집권할 기회를 뺏기 위해 노력하며, 따라서 집권 기회를 노리는 합당한 기대에 근거한 경쟁이 아닌 비합리적 수권투쟁에 나서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에서 정파에 따라 분열된 언론은 정파 간 화해불가능성, 갈등의 해결불가능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이 아니면 결코 없을 기회’를 강조함으로써 민주적 경쟁체제 자체를 위기로 몰고 간다. 민주정 내의 자유언론이 투표 전후의 선거불복, 정치보복을 위한 다짐, 또는 민주정을 방어하고 유지하겠다는 명목 하에 도입하는 정당해산 등 결사의 자유에 대한 극단적 제약 등 반민주적인 정책을 제안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언론은 대항세력들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집권세력을 돕기도 한다. 신생 민주정에서 때로 잔혹한 사태가 벌어지는 까닭은 집권세력이 특정 종족, 종교, 지역적 소수집단에 대한 억압을 동력으로 삼아 통치권을 행사하는 경우다. 집권세력은 시민들 간 종족, 종교, 지역 갈등을 활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시민사회 내 분열요인이 클수록 대항세력은 집권세력에 대한 민주적 압박을 행사할 동력을 얻지 못하지만, 반대로 집권세력은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인민주의적 합의를 유도해서 정치적 동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아시아에서 민주화 이행이나 공고화를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언론이 (권위주의적 집권세력을 돕는 언론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행을 위해 투쟁하는 언론마저도) 나서서 종족적, 종교적, 지역적 갈등의 논리를 정치적 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증오와 배제의 담론을 설파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유언론이 민주화에 기여하는 가장 중요한 경로가 바로 권력비판을 제도화하여 유지하는 일임을 알고 있다. 지금 집권자가 권위주의자이든, 인민주의자이든, 아니면 천신만고 끝에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민주주의자이든 그의 권력 남용을 폭로하고, 고발하고, 비판할 자유를 불가침의 권리로 유지하는 것이 곧 언론자유의 이념의 요체다. 흥미롭게도 아시아에서 바로 이 자유를 억압하는 다종다양한 통제의 논리가 계발되고 발전하고 있다. 그 중 인격권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모욕이나 명예훼손을 범죄화하는 규제가 고전적이면서도 강력하다. 개인과 집단의 명예에 대한 집착과 타인의 인격권에 대한 존중이라는 지역적 문화적 전통을 바탕으로 모욕죄와 명예훼손죄로 형사처벌하는 규제를 강화한다. 인터넷 검색 서비스와 교류매체의 등장에 따라 새로운 매체통제 논리를 개발한다. 증오발언과 가짜뉴스를 규제한다는 명목으로 인터넷 공론장에 대한 언론매체에 대한 노골적인 국가 개입을 정당화하고, 매체 사업자의 통제권을 강화하고, 시민 간 상호감시를 규범화한다.
아시아 국가들은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맥락에 따라 다른 수준과 양상으로 전개하는 민주화 노정을 경험하고 있다. 그 길에서 아시아 인민은 서로 다른 방식과 밀도로 언론자유 또는 부자유를 겪는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화 이행 또는 공고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너무 많은 변수들을 앞에 두고 그들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예상하며 곤혹스러워할 수만도 없다. 각자도생이라고 외치며 사실상 아무 일도 안 하는 가운데 언론매체가 민주화 또는 반동에 기여하는 그 특유의 패턴이 반복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